1982년 우리나라에선 한창 전두환씨의 5공 독재가 진행되던 시기, 저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이런 전쟁이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나이먹고 한참지나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 수직이착륙기가 사용된 전쟁이란 점이 엄청난 흥미가 생겨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같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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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하나의 섬이 아니라 동 포클랜드와 서 포클랜드라는 큰 두 섬과 나머지 2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뤄진 군도 - 이 포클랜드를 둘러싼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이 시작된 것은 종전일인 1982년 6월 14일로부터 겨우 75일 전인 1982년 4월 2일이다. 그러나 이 전쟁의 씨앗이 잉태된 건 사실 세기를 몇 번이나 달리하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이다. 우선 왼쪽 지도에서 포클랜드가 어딨나부터 확인해 보시라.
영국과 영토 분쟁이 났다는데 포클랜드가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중간쯤 되는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아르헨티나 쪽으로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다는 사실, 모르는 사람들 많았을 게다.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 본토에서 약 48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게 얼마나 먼거냐.
동해안에서 독도가 약 220Km 정도 떨어져 있고 부산에서 마라도가 약 286 Kim 떨어져 있으며, 한국과 사이판의 거리가 3,200 Km이고, 하와이까지는 7,500 Km이며 미국까지는 11,500km 정도다.
그럼, 이 포클랜드가 영국하고는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13,000 Km가 넘는다. 1,300 Km가 아니고 13,000 Km다.
이거 우리나라에서 미국보다 멀고 직선 거리로 프랑스나 이태리 정도 되는 거리다. 이건 거리만 놓고 본다면 한국이 이태리의 시칠리아 섬을 우리 땅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거다.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 놓고 보면 분명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포클랜드를 자기 영토라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듯 보이는데, 이렇게까지 아르헨티나에 가깝고 그렇게까지 영국에서 먼 섬이 어쩌다 영국령이 되었느냐.. 자 이제 몇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된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포인트를 차근차근 되짚어보자.
최초의 발견
이 기본적인 것부터 양쪽 주장은 엇갈린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6세기 초 포르투칼과 스페인 사람으로 구성된 마젤란 탐험대가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니 그 연장선 상에서 역사를 풀어보려는 의도다.
영국에서는 또 자기들 나름대로 16세기 말 영국의 항해사 John Davis가 최초라고 주장한다. 영국에서 만든 백과사전 브리태니카에는 그래서 John Davis를 최초 발견자로 떡 하니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사실 둘 다 문서로 확인된 기록은 없다. 그러니 누구 말이 맞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각자 자기 나라 역사 시간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최초의 상륙
반면, 섬에 발을 디딘 최초의 상륙자는 17세기 말 영국 탐험대다. 이건 논란이 없는데 이 탐험대는 'Falkland' 자작이라는 당시 해군관료 이름을 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섬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적어도 영국이 먼저 이 섬에 발자국을 먼저 남긴 건 맞다.
최초의 정착
그러나, 이 섬 최초의 주민은 스페인도 영국도 아닌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18세기 중반, 프랑스 항해사 Louis-Antoine de Bougainville가 최초로 동 포클랜드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다. 그 이후 이 섬에는 프랑스의 St. Malo에서 온 어부들이 건너와 살게 되는데, 여기서 지금 아르헨티나에서 자기들끼리 부르는 섬의 이름 말비나스 (Malvinas)가 유래된다.
얼마 뒤, 영국 사람들도 건너와 살며 거주하게 되지만 당시 남미 전역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초강국 스페인은 프랑스인들의 거주시설을 사들이고, 영국인 거주민들은 강제로 쫓아 내버린 후, 현재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관리관을 파견,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 본국이 점령될 때까지 약 50여년간 이 섬을 식민 지배한다.
최초의 소유권 주장
식민 본국이었던 스페인이 나폴레옹에 의해 정복되어(1808년) 그 막강했던 힘을 잃자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816년, 아르헨티나는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4년 뒤인 1820년, 최초로 포클랜드에 대한 소유권을 공식 선포하게 된다.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만큼, 스페인이 통치했던 땅은 자기들이 승계한다는 논리였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828년, 아르헨티나는 최초의 아르헨티나 정착민들을 섬에 이주시키고, 도지사에 해당되는 정부관료 그리고 주둔군을 파견한다.
최초의 충돌
아르헨티나인들이 포클랜드에 최초로 정착한 지 5년 뒤인 1833년, 영국은 섬을 군사력으로 빼앗아 아르헨티나 거주민들과 관료들을 모두 강제로 아르헨티나로 되돌려보낸다. 양국 최초의 충돌이다. 이후, 영국은 천 명 이상의 자국민들을 이주시킨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아르헨티나로서는, 당연히 스페인으로부터 승계했다고 생각했던 자기들 앞 바다의 섬을 졸지에 영국에 빼앗긴 것이다. 반면, 영국으로서는 융성했던 스페인의 힘에 밀려 잠시 쫓겨났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들이 먼저 상륙했었고 또 먼저 거주하고 살았던 섬을 되찾은 것이었고.
역사는 그렇게 꼬이기 시작한다.
빅토리아 여왕
그러나, 갓 독립한 약소국에 불과했던 19세기의 아르헨티나가 당시 전세계 인구의 25%를 지배하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영광의 빅토리아 여왕시대를 구가하던 영국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건 무모하다 못해 바보 같은 짓이었다. 홍콩이 영국에 넘어간 것도 바로 이 즈음이니 말이다.
아르헨티나로서는 힘이 약해 자신의 땅을 빼앗겼다 생각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이 작은 섬이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외세에 저항하는 국가 자주성의 상징이 된 역사적 연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에게 포클랜드는, 일본우익들이 독도 소유를 주장해 가끔 우리를 빡돌게 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격정적이고 극단적 감정 반응을 불러 일으키는 '섬'이다. 독도야 우리가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지만, 포클랜드는 아직도 영국이 차지하고 있으니 더욱 더.
아르헨티나는 그 이후로 150여년을 줄기차게 씨바거리게 되는데, 2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국가들의 독립과 영토 반환이란 세계적 추세에 힘을 얻어 1964년 UN의 탈식민지 위원회에 이 포클랜드 반환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게 되고 1965년 UN으로부터 양국은 평화적으로 협상하라는 권고를 받게 된다. 그 이후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양국은 17년간 계속해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다.
그러나.
비록 주민보다 펭귄이 더 많이 사는 군도라지만 근해의 석유와 남극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영국으로서는 포클랜드를 그냥 내놓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영국은 자신들이 이 섬에 최초로 상륙했고 최근 150년 이상을 '공개적이고 지속적이며 실효적으로 점거, 점유, 관리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만약에 < 포클랜드의 현지 거주민들이 원한다면 > 주권을 넘길 수도 있다고 공식 입장만 계속 반복한다.
얼핏 대단히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게 아주 교묘한 답인 것이, 포클랜드에는 이미 150년이 넘도록 오로지 영어만 사용하는 영국 이민자들만 2,000여명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이 아무도 없는 데 아르헨티나로의 귀속을 원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UN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아르헨티나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누가 최초로 발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영국인들이 최초로 상륙했고, 프랑스인들이 최초로 거주했으며, 스페인인들이 최초로 식민지화했고, 아르헨티나인들이 최초로 주둔군을 보낸 걸, 영국인들이 자기들이 가장 먼저 밟은 땅이라고 힘으로 밀고 들어와 지금까지 차지하고 있는 섬, 그게 바로 포클랜드다.
정치
그러는 사이..
아르헨티나는 20세기 들어 정치적 대격변을 겪는데, 어느 정도였나 하면 1916년부터 1976년 사이에 대통령이 무려 22번이나 바뀐다. 특히, 1930년대부터 등장한 군부 세력은 실권과 재집권을 거듭하다 - 이 사이 유명한 페론과 그의 아내 에비타가 등장한다 - 1976년 각군 사령관으로 이뤄진 구테타 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아예 군부 지들끼리 돌아가며 대통령을 해먹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거 박정희의 구테타 집권 이후 '하나회'의 전두환이 등장, 선배에게서 보고 배운 가락대로 대통령까지 해먹고 다시 자기 친구 노태우에게 대통령을 물려주는, 우리나라 군사정권 스토리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똑같다.
우리나라 '하나회'에 해당될 76년 구테타 군부 장성들..
우선 육군 중장이었던 '비델라'가 76년부터 81년까지 5년간 대통령을 해먹는다. 그를 이어 '비올라'가 대통령에 오르나 그 해 12월을 넘기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내분이 일어나 해군제독과 육군대장의 지지를 받은 '갈티에리' 참모총장이 81년12월 대통령에 오른다.
이들 정치군인집단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구테타로 집권한 군부가 세계 여느 나라에서 으레 그렇게 하듯, 좌익세력을 때려잡는다는 명목으로 - 어쩌면 이유도 다들 그렇게 똑같은지 - 무수한 시민들을 잡아 가두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행방불명 시킨다. 이 기간 동안 어떠한 기록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숫자가, 최소한 12,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은퇴한 한 아르헨티나 해군 조종사가 1995년 집필한 '비행' 이란 제하의 고백서에 따르면, 이 군사정권 시절 잡혀 온 사람들은 비행기에 태워 마약을 먹인 후 대서양 한 가운데로 날아가 발가벗긴 후 그냥 비행기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물고기의 밥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그 군사정권 시절 동안, 저자가 복무하던 공군기지에 매주 수요일 수 십 명씩 트럭에 실려 왔으며, 자신의 부대에서만도 최소한 2000여 명을 그런 식으로 대서양 한 가운데 던져 버렸다고 한다.
비옥하고 광대한 토지에서 나는 농축산물을 기반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에 공급하는 식량을 거의 혼자서 감당하며 194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5대 부국 중 하나로 부상하고 있던 이 나라는, 그렇게 반복되는 군부의 구테타와 그로 인한 불안정한 정치, 치솟는 실직율, 이반하는 민심, 인기위주의 경제정책 등으로 인해 1981년에는 이미 인플레이션이 600%에 이르고, GDP는 끊임없이 하향곡선을 그리는 수렁 같은 경기침체를 장기간 겪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6.10항쟁처럼 연일 계속되는 시민들의 시위 속에 취임한 '갈티에리' 대통령은 뭔가 강력한 돌파구를 필요로 했다. 우리 군바리들이 올림픽을 생각해냈듯, 충분히 강력해서 내부의 모든 불만을 잊게 만들고, 지금 나라가 희망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사람들을 현혹하고 설득할만한 획기적이고 강력한 뭔가가 필요했던 게다.
우리네 정치 군바리들이 막판에 몰려 6.29 선언을 생각해냈다면, '갈티에리'는 과연 군바리 출신답게, 그 돌파구로 포클랜드의 무력 탈환을 생각해내기에 이른다.
전쟁
사실, 이 갈티에리 대통령의 탈환 계획이 유혈 전쟁으로까지 확대된 것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여러 가지 판단착오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훗날 각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이 초기 포클랜드에 기습적으로 군대를 보낼 때만 하더라도 그것이 영국과의 전면적인 전투로 발전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군부 내부에 거의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우선 그들 스스로 포클랜드를 되찾아야 한다는 명분이 너무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서, 내부적으로 국민들을 한 번에 통합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이토록 명백한 건은 국제사회의 지지도 아주 수월히 얻을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또한, 일단 점령하고 나면 영광의 대영제국 시절을 뒤로한 체 NATO에서의 역할 감소, 군비 축소, 장기적 경기침체와 인기 하락까지 겪고 있던 대처가 설마 그때까지 대부분의 영국 국민들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는 그 머나먼 곳의 작은 섬을 되찾으려고 그 먼 곳까지 엄청난 비용을 써가며 군대를 보내겠냐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일단 점령하고 나면 미국 외교의 기본 기조인 '먼로 독트린' - 미대륙 국가들에 대한 유럽 지배나 그 연장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 과 1947년 미대륙 국가들끼리 체결했던, 외부의 침입이 있을 경우 서로 협력한다는 '리오 조약'에 근거해, 미국이 중간에 나서서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중재를 할 것이고 몇 가지 조건에만 합의하면 아마도 그 땅은 국제적 지지를 받는 아르헨티나 수중으로 손 쉽게 넘어올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비록 급증하는 데모 참여인원 등 급박한 국내 상황때문에 원래 계획보다 몇 달을 앞당기긴 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작전을 생각해 왔고 또한 군사력에 있어서도 결코 불리할 것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특히 공군력에 있어서 마하 2의 초음속 전투기 Mirage III와 Super Etnedard는 음속 이하의 영국 Harrier보다 빨라 공중전에서 훨씬 유리하고, 아르헨티나 쪽에서는 포클랜드가 비행거리 이내에 있었던 반면 영국에게 그 엄청난 거리는 - 군사작전의 한계로도 작용하겠지만 - 무엇보다 경제침체를 겪는 영국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82년 4월 2일, 포클랜드(말비나스)
탈환을 알리는 아르헨티나 신문기사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르헨티나의 군부는 남미의 전통적 마쵸이즘에 입각한 근거 없는 남성우월적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갈티에리' 대통령은 침공이 있던 4월 2일 TV에 나와,
자신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포클랜드를 되찾을 것이지만, "두 여자가 통치하는 - 엘리자베스 여왕과 대처수상 - 나라에서는 자신들의 자녀들을 희생시키기 꺼려할 것" 이라고까지 말한다.
이에, 모든 데모가 중지되고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당연히 열광한다. '독도'를 되찾았으니까.
벗트, 그러나.
역사가 언제 그렇게 호락호락 했던가.
침공한 몇 일간은 모든 것이 자기들 뜻대로 돌아가는 듯 했다.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압도적 숫자로 섬을 수비하고 있던 소수 군대와 섬의 영국 관리를 항복시켰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적 판단에는 몇 가지 결정적 오류가 있었다.
공군전이 될 것이라 예상한 것까지는 옳았고 또 자신들의 전투기가 더 우수한 것까지는 정확한 판단이었으나, 본토에서 출격해서는 공중전을 펼칠 만큼 연료를 실을 수 없어 본토가 아니라 포클랜드에서 출격했어야 했으나 포클랜드의 활주로는 전투기가 출격할 만큼 길지가 못했다. 그런데, 실제 계획보다 몇 달 앞서 침공함에 따라 그 활주로를 늘이는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실어 나를 배조차 준비하지 못하고 전쟁을 시작해버리고 만 것이다.
나중에 배를 마련했을 때에는 이미 영국의 잠수함이 근해를 차지해버린 후였다. 결국 실제 전투에 있어서는 공중전으로는 영국의 주력 기종인 Harrier기를 단 한 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반면 영국의 Harrier기는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렸지만, 수직이착륙이 가능했으므로 어디서 건 출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다른 미대륙의 국가들이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것이고, 국제사회가 분명한 명분이 있는 자기들 편이 될 것이란 생각은 냉엄한 국제 정치에서는 무식한 군바리들의 순진한 착각에 불과했다. 그들은 다른 나라는 고사하고 남미 국가들로부터도 전폭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
반면, 영국은 발 빠른 외교로 몇 일만에 UN과 NATO, EEC의 지지를 얻어 냈으며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아르헨티나 바로 이웃나라인 칠레의 피노체트까지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훗날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하필 영국에 병 치료차 간 건 그런 배경이 있었다 - 영국은 매정하게 그를 배신했지만. 특히, 레이건 미 행정부는 아르헨티나를 도와주기는커녕 정반대로 영국에 군사적 지원과 아르헨티나에 경제 제재 초지를 내린다. 이 조처는 미국 정부가 남미에서 신뢰를 크게 상실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 외에도 전면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던 군부는 예비군조차 소집하지도 않았고, 10,000이나 되는 군대를 보냈지만 그들 대부분은 경험 없는 신병들로 도대체 전쟁을 할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여러 판단 착오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영국의 '두 여자'에 대한 것이었다.
대처수상은 전쟁이 포클랜드를 침공하자 단호한 의회 연설을 통해 영국민들을 단합 시키고 즉시 군사작전을 명령한다. 그는 이 포클랜드 전쟁에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 나는 패배의 가능성을 결코 믿지 않는다. 그런 가능성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
왕실은 또 어떠했는가. 제2차 세계대전시 자원 입대하여 군용트럭을 몸소 운전하기까지 했다는 여왕 엘리자베스의 아들 앤드류는, 즉시 참전한다.
왕자가 직접 참전했다는 걸 아는 아르헨티나 쪽으로부터 최우선 공격 목표가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감수하고 헬기 조종사로서 전쟁에 참전한 앤드류 왕자는, 포클랜드를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영국의 의지를 국제 사회에 분명하게 천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나자 가장 위험한 함대에 가장 위험한 임무를 가장 먼저 자임해 최전선으로 달려가는 왕자를 보고 충천했을 영국군의 사기, 지도층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아.. 씨바.. 이런 거 우리하고 진짜 다르다... 갑자기 욕 나올라고 한다...
여하간, 이 두 여인의 의지는 '갈티에리' 대통령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고, 전쟁 전체를 통털어 그가 가장 잘못 판단한 'factor'였다. 물론, 그렇다고 전쟁 자체가 아주 간단하게 영국의 승리로 끝난 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도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한때 세계 5대 부국 중 하나였던 국가 아니던가.
영국이 "Conqueror" 잠수함을 앞세워 포클랜드의 전쟁에서 단일 건으로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인 362명을 전사시키며 아르헨티나 주력 구축함 'General Belgrano'를 격침시켜 기세를 드높이자 - 이 격침사건은 전쟁지역으로 선포됐던 금지구역 바깥에서 이뤄진 것으로 영국정부는 불필요한 인명살상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 역시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의 대표적인 구축함 'HMS Sheffield'를 격침시키는 등 나름대로 전쟁은 주고 받는 혼전 양상을 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전투기들이 영국 구축함에 퍼부은 폭탄의 겨우 20%만 폭발했다고 할만큼 준비되지 않은 체 벌어진 전쟁에서, 왕자까지 목숨 걸고 싸우러 나온 나라하고 붙어서 도대체 어떻게 이길 수가 있었겠는가.
이 전쟁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아르헨티나 공군 조종사들의 우수한 조종술과 용감한 군인정신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진행될수록 우월한 무기로 무장한 영국의 우세로 기울어 결국 포클랜드에 상륙한 영국의 코만도와 공수부대의 투입으로 이뤄진 육지전 끝에 당시 포클랜드에 주둔하고 있던 주력군을 대부분을 포로로 하여, 전쟁이 시작된 지 75일째이자 82년 스페인 월드컵 개막 경기가 열린 날인 6월 14일, 아르헨티나는 항복문서에 서명하게 되고 전쟁은 끝을 맺는다.
'독도'를 다시 뺏긴 것이다.
그 후
아르헨티나 쪽에서 655명, 영국 쪽에서 236명이 전사하며 공식적으로 74일만에 끝난, 사실 국제 분쟁으로는 짧은 기간 내에 종결 지어진 그리 크지 않은 전쟁이었지만, 이 한 번의 전쟁은 양 국가를 완전히 다른 스테이지에 들어서도록 밀어넣은 역사적 터닝 포인트였다.
이 패배로 아르헨티나 '칼티에리' 대통령은 종전 다음 달 사임하고 그의 뒤를, 돌아가며 해먹는다는 그들의 규칙에 따라, 또 다시 군부 출신 비뇨네 장군이 잇게 되나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마침내 굴복, 다음 해 민간정부가 들어서게 되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군대에 대한 신뢰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고, 국가적 리더쉽 자체가 엄청나게 위축되고 만다.
반면, 영국에서는 집권 초기 인기가 저조했던 대처가 그 다음 해의 선거에서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표 차로 승리하면서 영국 현대사에서 최장기로 기록되는 집권체제를 구축하게 되고, 여기서 얻은 인기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훗날 '대처리즘'이라 불리는 강력한 경제정책을 펼쳐, 19세기 대영정국의 영광만 반추하며 열패감에 빠져 2류 국가로 전락해가던 영국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20세기에 걸맞는 현대국가로 튜닝 해낸다.
사실, 포클랜드가 아르헨티나의 영토이어야 하는 지리적, 역사적 근거는 충분했고 지금도 충분하다. 또 자신들 스스로가 설득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명분도 부족함이 없었다.
만약, 영국이 이미 19세기 전세계적 식민지배 경험을 가졌기에, 국제적 영토 분쟁을 다루는데 있어 외교적으로 아르헨티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하지만 않았다면.. 또, 아르헨티나의 군바리들이 이 문제를 자신들의 정치기반 연장이나 인기회복 수단이라는 정략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준비하고 덤벼들었다면... 그랬다면 아마 포클랜드는 지금 아르헨티나의 영토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왕조 이후 스스로의 투쟁 결과가 아니라 일본 패전이란 외부 환경의 변화로 창졸간에, 과거 봉건사회의 규범과 질서에 대한 사회적 정리나 마무리 없이.. 또 친일세력에 대한 정치적 단죄나 청산 없이.. 갑자기 모든 중간과정을 건너 뛰어 근대적 민주국가라는 껍데기만 뒤집어 썼기에.. 그 이후 50여 년을 구테타와 군부독재를 반복하며 역사 속을 헤매야 했던 우리 경험은, 결코 우리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독립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폴레옹의 스페인 점령으로 갑자기 식민지배가 끝나면서 느닷없이 독립을 맞이하게 된 아르헨티나는, 그 과정에서 과거 식민역사에 대한 정리나 부역자들에 대한 청산 등을 밀도있게 해내지 못했고 그렇게 국가적 리더쉽의 확고한 정통성이 미비한 상황에서 근대국가의 성립과정 통과하게 된다. 아르헨티나 역사를 지겹게 수놓는 구테타와 군부 독재, 민간정부의 교체는 바로 그렇게 해서 잉태된 것이었다.
결국 그런 역사 속에 탄생한 정통성 없는 군부와 그런 정통성의 결여가 초래한 조급함은 포클랜드 전쟁을 그 출발부터 뒤틀어 버린 것이다. 역사의 인과와 아귀는 언제나 그렇게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만약..
종전 후 계속해서 독도를 일본이 차지하면서 일본인들을 거주시키고 자위대를 배치하고 공개적이고 실효적으로 지금껏 점유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끼리 삼국사기를 쥐고 흔들며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했다고 분노한다고 독도가 우리 영토가 되느냐... 물론, 절대로 아니다.
일본도 나름대로 17세기 덕천 막부시대부터 자신들이 실효적으로 점유했다고 주장할 것이고, 1905년 국제법이 요구하는 절차에 따라 '다케시마'라 고시했다고 할 것이며, 한국본토보다 오히려 일본본토에 더 가깝다고 주장할 것이고, 김정호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고 떠들 것이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일본영토를 되찾았는데 독도도 그때 찾았어야 했던 영토라고 떠들 것이다.
그리고, 전셰계의 유명 지도에 동해를 'sea of Japan'이라고 표기하도록 만들고 있는 일본은 제 3자가 보기에 '일본 해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이 당연히 일본의 영토로 보이도록 꾸준한 작업을 하고 있으며, 향후 국제 사법재판소로 이 문제를 끌고 가거나 정치적, 외교적 쟁점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반면, 우리 쪽의 독도 영토 고시는 해방 후인 1952년에 하게 되니 결코 유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끔 국내 정치인들이 일본 우익의 독도 발언에 흥분하며 미디어를 통해 독도는 우리 땅이라며.. 백만인 서명하자.. 어쩌자 하며 떠들어대는 흥분은 - 영토 문제가 국가적 자존심과 가장 민감하게 연결된 것이라 한편으로 이해는 가지만 - 결국, 닭짓이다. 독도 관련해 우리끼리 감정적으로 흥분하기만 하는 건, 아르헨티나가 오늘날까지 180년 동안 자기들끼리 떠들어봐야 전혀 아무 것도 해결이 안 되는 것처럼, 국제적 영토 분쟁이란 이슈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 섬을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이 우리 쪽인 이상, 아예 분쟁의 흔적 자체를 남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유리하다는 말이다.
19세기에 이미 자국민과 군대와 관리까지 보내고도 영국에게 쫓겨나서, 포클랜드는 '영국 제국주의가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섬이라는 아르헨티나의 주장이 UN 탈식민지 위원회에 타당한 문제제기라고 받아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실질적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 걸 봐도 지금 이 순간 '공개적이고 지속적이며 실효적으로 점유, 점거'하고 있다는 것의 중요성은 매우 결정적이다.
그래서 그런 감정적 대응 보다는 일본이 뭐라고 떠들던 완전히 생까버리고, 조용하고 냉정하게 우리가 수집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사적 사료를 모아 보강하고, 국제법 레벨에서 방어논리를 개발하고, 내셔널 지오그래피 같은 곳을 통해 독도 자연 다큐멘터리 같은 거 만들고, 독도를 관광 패키지화 하기도 하면서 그 곳이 당연히 우리 영토임을 자연스럽게 증명하는 국제적 데이타와 기록들을 꾸준히 쌓아 가는 것.. 그런 노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거다.
그리고, 만에 하나 독도 전쟁 나면 제일 먼저 정치인 군면제 아들들부터 소집해, 해병 상륙대로 가장 먼저 투입하고..
특히 국민사기에는 이 조치가 가장 효과가 크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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