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툰

[ 카툰 ] 파락호(破落戶) 김용환




파락호(破落戶) 김용환

2년전 퇴근길에 지하철에서 5백년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라는 책을 봤다.의성김씨 부분을 읽다가 눈물이났었다. 조선몇대 파락호 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집안재산 다 말아먹었다고 가족들 에게까지 원망을 들으며 살다가신 김용환 님,그 따님 김후웅여사의 서간문,알고보니…

지금부터 그 얘기를 시작된다.

의성김씨(義城金氏)의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로 의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하였다.

왜경에게 무릎꿇린 치욕

1800년대 후반 김흥락이 안동 일대에서 지녔던 권위는 대단했다. 그 상징적인 예를 보자. 1890년 안동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신임 부사가 아전들과 짜고 읍민들을 착취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 해결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김흥락의 중재였다. 김흥락은 유림사회와 민중들 모두가 신뢰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흥락이 향청에 좌정하여 “무릇 민정은 순하면 따르고 역하면 뿌리치는 법이다.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기다리라”고 한마디 하니, 운집해 있던 읍민들이 “그 나으리께서 우리를 속이겠는가? 그만 집으로 가세나!”하고 모두 해산했다고 한다.

김흥락이 지닌 이러한 권위는 구한말 일제가 들어오면서 참담한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 굴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사들은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에 나섰다. 인구비율로 볼 때 전국에서 항일지사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1896년 7월22일 학봉집안과 김흥락이 겪었던 굴욕의 한 대목은 이렇다.

“김회락 의병포대장이 지휘하는 100여 명의 의병이 안동시 북후면 옹천에서 일본군에 패전하였다. 김회락 대장은 간신히 도망하여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던 학봉종택 안방 다락에 숨었으나 발각되어 결박되었다. 이에 화가 난 왜경은 김흥락과 김흥락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홍락, 김익모 등 평소에 의병활동을 했던 집안어른 10명을 포박하여 종가 큰마당에 꿇어앉히고, 살림을 전부 마당에 꺼내어 금비녀 등 쓸만한 물건은 전부 가져가고 큰살림은 못쓰게 부수는 등 종가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한참 동안 분탕질을 한 후 다른 분은 풀어놓고 김회락 대장과 같이 활동한 김진의 두 분을 안동경찰서(안동관찰부兵隊)로 압송하였다. 김진의는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김회락 대장은 왜경의 총살 위협에도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보수(報:원수를 갚다)를 가르쳐라!’고 지켜보던 가족들에게 소리치며 당당하게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어 의병대장의 처절한 일생을 마감하였다.”(‘西山 金興洛의 독립운동과 그 餘脈’)

의병대장 김회락은 김흥락과 사촌간이다. 왜병을 피해 사촌형님집이자 종가인 학봉종택에 은신해 있다가 벌어진 일이다. 안동의 어른이던 김흥락은 왜경에게 포박당해 자기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수모를 겪었고 사촌동생인 김회락은 총에 맞아 죽어야만 했다. 이는 개인과 집안으로 볼 때는 수모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존망을 염려했던 영남의 명문선비 집안에서 치러야만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제, 즉 사회적 책임으로 볼 수도 있다.

안동 일대에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김흥락이 왜경에게 포박당해 마당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사건은 안동의 유림들과 학봉집안을 포함한 의성김씨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그 치욕은 안동유림들과 학봉 후손들을 독립운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흥락의 제자들 명단을 기록해 놓은 ‘보인계첩((輔仁帖)’이라는 문건을 보면, 서산의 제자는 모두 707명이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람만 해도 60명에 이른다. 훈장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파락호로 위장해…

김흥락이 종가 마당에서 포박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있었다. 당시 나이 10세였던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이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70세의 조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21세 때에 이강계(李康秊) 의병진(義兵陳)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는 등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이 났었다. 명문가 종손이 되어 가지고 집안 살림을 망해먹은 대표적인 사례로 ‘학봉 종손 김용환’의 이름 석자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는 김용환의 철저한 위장했다.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하였던 것인데, 얼마나 완벽했던지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손이 진짜 노름꾼인 줄 알고 원망이 자자했다. 오죽했으면 ‘양반동네 소동기’라는 책의 저자인 윤학준이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그리고 학봉 종손인 김용환을 꼽았을까.

김용환의 항일운동 방법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재산인 전답 700두락 18만평(현재 시가로 180억원)을 모두 독립군자금으로 보냈다. 그러다보니 말년에는 종가 살림이 거의 거덜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야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냈던 그의 비밀스런 행적이 여러 자료에 의하여 드러났다. 그는 1946년 임종에 이르러서도 끝내 그 비밀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죽었지만, 근래에 독립운동을 했던 자료와 증거들이 발견됨으로써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가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받게 되자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한 많은 소회(所懷)를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서간문으로 남긴 바 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학봉 종손이 파락호로 위장하면서 그 많던 종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외동딸 시집갈 때 필요한 장롱 살 돈마저 써버려 큰어머니가 쓰던 헌 농을 가지고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는 읽은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그러나 그 돈이 노름해서 탕진한 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고보니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던 딸의 입장에서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너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끝내 발설하지 않았던 김용환의 그 결의와 각오가 놀라울 뿐이다.

짐작하건대 그 결심은 그가 10세 때 하늘같이 여겼던 조부가 왜경에게 수모를 당하던 광경을 목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카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카툰 ] +++ S-man +++  (0) 2011.11.18
[ 카툰 ] '애인' 사랑하는 사람?  (0) 2011.11.18
[ 카툰 ] +++ 신입사원 면접 +++  (0) 2011.11.18
[ 카툰 ] 수영장  (0) 2011.11.18
[ 카툰 ] MT  (0) 2011.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