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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국제] 시오니즘에 대한 간단한 설명



시오니즘의 발단은 기원전 6세기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민족이 바빌론으로 유수되어 갔을 때 그 예언자들이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민족을 팔래스티나땅으로 다시 귀환케 하실 거라고 위로를 했다는데, 이 상황무마적 예언을 유대인들이 철썩같이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프랑스혁명을 전후해서 유럽에 민족주의의 열풍이 몰아치고, 유대민족이 오랜 신분제적 굴레에서 벗어나 민족적 재각성을 이루게 되면서 이들은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팔래스티나 귀환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이는 1896년 오스트리아출신의 유대계 언론인 Theodor Herzl이 전세계 유대인들에게 독자적인 유대민족의 국가건설을 주창하고 다음해 제1차 시오니스트 세계의회를 소집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처음에 썼던 방법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유감스럽게도 제국주의 영국에 비열하게 협조하여 팔래스티나를 그 대가로 넘겨받으려는 방법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1차대전시 영국에 막대한 재정원조를 해주고 그 대가로 영국 외상 Arthur J. Balfour에게서 팔래스티나에 이스라엘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비밀문서까지 받아내었지만, 1917년 영국이 팔래스티나를 무력으로 점령한 이후로도 영국은 좀체로 팔래스티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아랍인들이 나름대로 그 지역에서 오래 유지하고 있는 평화질서를 깨뜨릴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독립을 외교적으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44년 Menachem Begin의 영도하에 무식한 게릴라전과 잔인한 테러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수많은 영국인과 아랍인들을 살상하고 결국 1948년 5월 14일에는 자력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부차적인 공헌을 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일 나찌들이었다고 많은 이들이 얘기한다. 2차대전 동안 그들이 너무나 많은 유대인들을 잡아죽인 탓에 이후의 세계 여론이 유대인들에게 동정적으로 변해버린 때문이다. 물론 유대계 언론재벌들이 당시 미국대통령 Harry Truman을 움직여 이스라엘 독립을 지원케 한 것도 이스라엘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도 분석된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2500년전 자기 조상들이 거기에 살았고, 성경에 그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팔래스티나를 무력점령해버린 것은 기독교도들 입장에서야 뭐 그럭저럭 납득이 될 일인지 몰라도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이게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기독교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마호메트교도들의 입장에서도 성지이긴 마찬가지고, 거기서 팔래스티나인들 같은 경우는 2500년 동안을 나름대로 기쁜 일 슬픈 일 겪으며 대대로 평화롭게 살았는데, 아무리 전세계적으로 기독교가 힘이 더 세다지만 이렇게 힘으로 무식하게 막 밀어붙여버려도 되느냐는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세계에 양식 있다는 사람들은 다들 유대인들이 진정 세계 속의 민족으로 자리매김하려면 과거의 인종적인 증오에 바탕한 것이 아니라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시민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따라서 기존의 시오니즘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이런 가치판단에는 기독교를 믿고 안 믿고가 개입되어선 안된다고 주장해왔었다. 여기에는 심지어 많은 수의 유대인들도 공감을 하기 시작했으며, 더이상 팔래스티나를 유대인들의 독점적인 도피처로 삼아서는 안되고, 팔래스티나인들의 자치와 그들의 이스라엘 사회에로의 통합을 존중하여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포스트시오니즘까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에서는 다들 알다시피 아직 납득이 안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호전적 극우시오니즘이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느껴질 테고, 더군다나 국내의 수많은 기독교도들은 유대교의 형식주의에는 반대하면서도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에는 동의하는 기묘한 사고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비판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게 된다.